(과도한) 걱정을 멈추는 방법을 말하는 데일 카네기?

걱정은 걱정을 낳는다.

걱정이라는 것은 또 다른 걱정을 무한히 양산할 수 있다.

이 걱정, 저 걱정… 피어나는 걱정들은 스스로 자라기까지 하며, 속은 하염없이 피어나는 걱정들로 가득차서 더 중요한 것들은 받아들일 수가 없게 된다.

하지만 걱정은 해야 하고, 꼭 필요한 것이다. 살아가는 동안에..

(과도한) 걱정에 대해서 생각하기 전에

‘걱정’에 대해서는 데일 카네기를 빼놓을 수 없다. 이름을 다 말하기도 전에 누군지 떠 올릴 수 있을 정도니까.

데일 카네기로부터 세일즈 교육 배우기에서 데일 카네기의 노력과 탐구심에 대해 말한 바 있다.

데일 카네기는 자기 계발의 아버지로도 불릴 정도로 뛰어난 사람이다. 그의 생각과 글, 말들은 많은 사람에게 위안과 도움을 주었다.

그의 노력도 우리는 배워야 한다. 일단 그는 그(데일 카네기) 자체로도 매우 뛰어나다. 덧붙여 또 한 가지 뛰어난 점을 말 하자면, 그는 끊임없이 각 시대의 뛰어난 사람들과 각 대륙의 뛰어난 사람들을 조사했다.

그리고 그것들을, 직면하는 많은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연구 및 분석을 하였다. 그러하여 탄생한 그의 저서들은 세상의 많은 사람들을 위한 길잡이 혹은 지침서가 되어 주었다.

우리 같이, (과도한) 걱정에 대해, 좀 더 깊숙히 들여다보자.

내일은 중요하다. 그러나 오늘은 더 중요하다. 그보다 지금은 더 중요하다.

(과도한) 걱정으로 겨우 서 있는 듯한 노인의 모습.
흐릿한 자동차 상판 너머로 보이는 노인. 노인의 내적 고통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우리는 멀리 희미하게 보이는 것을 보려 하지 말고, 눈 앞에 분명히 놓여 있는 것을 행해야 한다.”

-토머스 칼라일

미래를 준비하는 것, 그 중요성은 당신도 알고 나도 알고 아이들도 아는 일이다. 길게 말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토머스 칼라일의 위와 같은 말에서는, 그것에 대해 말하고 있다. ‘미래와 걱정’ 그리고 ‘오늘'(혹은 ‘지금’).

만약 이 뜻과 같다면, 혹은 비슷하다면 이것은 최악의 문장일 거라고 생각한다.

‘걱정’과 ‘생각’으로서 바라보자.

걱정과 생각은 같은 것이 아닐까?

걱정과 생각의 유사성과 차이를 아는 것은 때때로 중요할 때가 있다.

먼저 , ‘걱정’과 ‘생각’의 사전적 의미를 보자.

‘걱정’

– 안심이 되지 않아 속을 태움.

즉,

-안심이 되지 않아 불안한 감정 또는 어떤 것을 위하거나 생각하는 마음을 일컫는다.

-걱정은 여러 가지로 마음이 쓰이는 감정을 의미하며, 불안의 일종으로 볼 수도 있다. 비슷한 말로 ‘심려’, ‘염려’, ‘근심’ 등이 있다.

한편 안정이 되지 않는 심리적인 상태나 감정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생물학적으로 어떠한 위험이 개체의 존재를 위협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지각함으로써 불확실한 미래에 대처하는 효과적인 문제해결 과정에서 발현하는 감정 상태를 지칭하기도 한다.

‘생각’

– 사물을 헤아리고 판단하는 작용.

-어떤 사람이나 일 따위에 대한 기억.

-어떤 일을 하려고 마음을 먹음. 또는 그런 마음.

-앞으로 어떤 일에 대한 의견이나 느낌을 가짐, 또는 그 의견이나 느낌.

-어떤 일에 대한 의견이나 느낌을 가짐, 또는 그 의견이나 느낌.

-어떤 사람이나 일에 대하여 성의를 보이거나 정성을 기울임. 또는 그런 일.

-사리를 분별한. 또는 그런 일.

즉,

-어떤 관념에 도달하기 위한 의식적인 정신적 과정, 헤아리고 판단하고 인식하는 것 따위의 정신 작용, 다른 말로는 ‘사유’, ‘사고’라고 한다.

나아가 생각하는 힘, 다시 말해 사고할 수 있는 능력을 사고력이라고 하며, 이 힘은 일상생활의 크고 작은 문제나 대화를 주고받는 경우부터 시험이나 면접과 같은 데까지 주어진 상황에 만족하는 결과나 해법을 얻기 위해 일생 동안 끊임없이 요구된다.

-결론을 얻으려고 판단하고 인식하는 관념의 과정이다. 목표에 이르는 방법을 찾으려고 하는 정신 활동을 말한다. ‘사상’, ‘사유’라고도 한다.

지각이나 기억의 활동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은 경우에, 어떻게 이해하고 또 행동해야 할 것인가를 헤아리는 활동을 ‘생각’이라고 말한다.

그렇다. 걱정은 누구에게나 존재하는 것이다. 언제나 우리와 함께하는 정신적인 것이다. 또한 생각도 그렇다.

이 ‘걱정’과 ‘생각’이라는 단어, 분리하거나 합쳐 놓기가 굉장히 애매모호한 것 같다.

걱정이 곧 생각일 수 있고, 생각이 곧 걱정일 수 있다고 생각이 들기 때문에..

음.. 이것들의 유사성과 차이에 대해서는 굳이 지금 여기서 우리가 파고들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위의 문장을 우리가 같이, 약간 다른 각도로도 볼 수 있을까 싶었지만, 그럴 필요도 없을 것 같다. 그러나 ‘걱정’과 ‘생각’의 사전적 의미에 대해 알아본 것은 잘한 것 같다. 이전보다 훨씬 도움이 되었다. 여러분들한테도 도움이 많이 되었을 거라고 짐작해 본다.

(‘걱정’과 ‘생각’을 따로 놓고 보기에도, 같이 모아 놓고 보기에도 굉장히 애매모호하기에.. 여기서는 그냥 애매모호한 채로 이 둘을 계속 말하겠다. 말을 잘하는 편이 아니니 양해 부탁드린다..)

걱정은 사람의 본능이다. 결코 부정적인 것만이 아니다. 우리는 사람이기에 안심을 할 수가 있고 혹은 안심을 할 수 없을 수도 있다.

우리는 생각하는 존재이기에 걱정도 존재하는 것이다. 걱정을 할 수 있는 존재이기에 생각도 할 수 있는 것이다.

여기에는 감정이 따른다. 우리는 사람이기에 감정을 느끼고, 그러하여 생각과 걱정도 할 수 있고 또 하지 않을 수도 있다.

사람은 오늘 내일 걱정을 해야 한다. 할 수밖에 없다. 시도 때도 없이 할 수도 있다. 가깝거나 먼 미래를 걱정할 수도 있고, 오래되거나 최근의 일들을 걱정할 수도 있다. 걱정을 하지 않거나 덜 한다고 해서 누가 도와주지 않기 때문이다. 세상이 도와주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일을 해야 하고 사람과의 일, 생활적인 면에서의 일 등에서 끊임없이 걱정과 생각을 해야 한다. 도저히 멈출 수가 없다.

걱정과 생각을 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다고 해서 인간관계, 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 등이 저절로 좋아지거나 생겨나지 않는다. 즉, 공짜가 없는 셈이다.

당연하지 않은가?

우리는 우리의 주인이다.

다른 사람이 우리의 주인이 아닌, 우리 스스로가 우리의 주인이다.

그렇기에 우리가 우리의 앞을 내다보는 것과 뒤를 되돌아보는 것은 당연하지 않은가? 생각과 걱정을 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것이 많든 적든.

그러면 이제 위의 토머스 칼라일이 말한 “우리는 멀리 희미하게 보이는 것을 보려 하지 말고, 눈앞에 분명히 놓여 있는 것을 행해야 한다.”를 다시 한번 보자.

‘물론 미래는 중요하다. 하지만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고, 우리는 언제든 미래를 준비할 시간과 정신이 있다. 미래를 위해 걱정과 생각을 할 수 있지만, 지금은 눈앞에 닥친 오늘, 바로 지금의 일들이 더 급하고 중요하다. 어쨌든 지금이 중요하니, 우선순위를 생각해 보라.’라는 말은 어떤가? 이렇게 보면 우리가 적당히 걱정할 수 있는 최고의 문장이 될 수 있다. (만약 이 뜻이 아닌, 정말로 저기 위에(처음) 언급한 뜻이라면.. 나는 이 문장을 싫어할 것이고, 이 말을 한 토머스 칼라일을 싫어할 것이며 그를 경계할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봐도 저기 위에(처음) 언급한 뜻으로 들리는 것은 왜일까;)

필요한 걱정, 불필요한 걱정

그는 무언가의 방법을 찾고 있는 듯하다. 힘겨워하는 것 같기도 하다.
도대체 무엇이 저 남자를 저렇게 만들었을까.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가, 아니면 기도를 하고 있는가, 아니면 그냥 정신이 나가 있는가, 아니면 울다가 지쳐 잠시 졸고 있는 것인가.

데일 카네기는 일어날 가능성을 말한다.

우리가 하는 걱정들 중에서 많은 부분들이, 아직 일어나지는 않았지만 앞으로 일어날 가능성이 적다고 말한다. 아직 일어나지는 않았지만, 걱정하는 일이 실제로 일어날 수도 있는 일은 아주 적을 수 있다고 말한다. 그렇게 때문에 걱정은 정신과 몸의 건강을 다치게 할 수 있다고 한다.

이 말도 맞다. 그러나 보통 걱정에 대해서 말하는 사람들을 보면, 고개가 갸우뚱하게 되기도 한다. 마치 ‘걱정’이라는 것이 나쁜 것인 것처럼, ‘좋지 않다’라고 하는 것만 같다고 느껴지기 때문이다. 많은 부분에서.

이런 식으로 말하는 사람들이 많다.

나는 틀렸다고 본다. 그들은 잘못되었다.

걱정이라는 말을 하기에 앞서, 분명히 하고 본론으로 들어가야 하는 말들이 ‘분명히’ 있다. 바로 ‘과도한 걱정’, ‘지나친 걱정’에 대해서 말을 할 것이라는 점을 말이다.

그렇지만 그들은(걱정이 좋지 않고 나쁜 것이라고만 하는 사람들) 그렇지 않았거나, 전혀 그럴 생각도 마음도 없는 경우도 많다. 이 때문에 그들이 한 말들은 멋진 말들은 맞지만, 오류투성이의 말들이 많다. 위험한 말이다.

그들은 뛰어난 사람이고 뛰어난 말을 시대에 남긴 것은 분명 맞지만, 지금 말하는 이 부분에서는 섬세하지 못했다. 오류를 범했다.

그들은 (걱정은 좋은 것이나) ‘지나친’ 혹은 ‘과도한’ 걱정은 좋지 않을 수 있다는 점을 ‘분명하게’ 말을 하고 시작을 했어야 했다. 그러나 그들은 전혀 그렇지 않거나, 상당히 그러하지 않았다. 즉, 걱정은 나쁜 것(좋지 않은 것)이라고 말하게 되는 것이다.

그들은 많은 사람들의 마음에 도움을 준 고마운 사람들임에는 틀림없다. 그래서 더욱 아쉽다.

분명히 말하고 싶다.

“‘걱정’과 ‘생각’은 좋은 것이다. 그러나 ‘지나친 걱정과 생각’은 좋지 않은 결과를 낳을 수 있다.”라고 말이다.

‘지나친 걱정’, ‘과도한 걱정’에 대해서 말을 하는 거라면 도움이 될 수 있다. 하지만 그렇지 않아서 역효과를 낳는 것이다.

걱정과 생각이 줄어들면 머리(뇌)의 수준도 같이 줄어든다. 걱정과 생각을 하지 않게 되면 머리(뇌)도 돌아가지 않게 된다.

그들이 (단순히 걱정은 좋지 않다고 하는) 말하는 방법은 ‘수동적인 머리(뇌)를 만드는 방법’이다.

그들은 이렇게 말하고 접근했었어야 했다. ‘지나친(과도한) 걱정을 줄이는 방법’이라고 말이다.

걱정을 해야 한다. 생각을 해야 한다. 많이 해야 한다.

어떤 걱정을? ‘과도하지 않은 걱정’을. 그것은 건강한 걱정이다.

필요한 걱정? 불필요한 걱정?

우리는 신이 아니다. 컴퓨터가 아니다. 사람이다. 걱정은 걱정이 들만하기 때문에 걱정하는 것이다.

걱정이 들만하지 않은데도 불구하고 습관적으로 걱정을 많이 하는 경향이 있다면, 도움이나 방법이 필요할 수 있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다음 말과 무엇이 다른가? 아마 다음 말과 ‘정도의 차이’일 뿐일 것이다.

예를들어, ‘이 일은 이만큼만 걱정을해야지.’, ‘이 정도의 생각이면 충분하겠어.’

또는 ‘아, 저 생각은 좀 더 많이 해도 될 것 같아.’, ‘걱정을 많이 하기로 하자^^’

……

삶은 게임이 아니다.

삶은 작성한 대로 진행되지 않는다. 삶이 진행되는 것을, 우리는 일기를 쓸 뿐이다…

분명히 알아야 한다. 편한 것만이 좋은 것은 아니다.

‘걱정을 하지 않는 것’은 자기 계발이 아니며, 우리의 수준을 높여주는 방법이 아니다.

걱정을 하지 않는 방법 = 바보를 만드는 방법

이 공식에 속지 않기를 바란다.

jj의 생각

무엇이든 지나치면 좋지 않다.

‘넘침은 모자람만 못하다’라는 말처럼, 걱정과 생각도 지나치면 오히려 몸과 마음을 상하게 할 수 있다. 심하면 피폐해질 수 있으니, 잘 다스려야 한다.

우리가 돈과 음식을 조절하듯이, 생각과 걱정도 ‘과도하다면’ 조절할 필요도 또한 있다.

적당한 걱정과 생각은 오히려 좋을 수 있다는 말이다. 아니, 오히려 늘 필요한 것이다.

만약 ‘모든 걱정을 떨쳐 버려라. 걱정(혹은 생각)은 많아서 좋을 것이 없다.’라고 말을 한다면, 나는 그것에 동의하지 않는다.

우리는 사람이지 로봇이나 기계가 아니다. 애초에 불가능할뿐더러, 적당한 생각과 걱정은 살아가는 데 있어서 중요하다. 아니, 오히려 생각과 걱정은 항상 필요한 만큼 자연스럽게 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당연하다.

회피는 답이 아니다.

‘걱정을 하지 않는 방법’을 찾고 있는가?

‘걱정을 하지 않는 방법’ = ‘회피하는 방법’이다.

잠깐은 회피할 수 있지만, 회피할 때마다 불어나는 눈덩이들은 기필코 닥칠 것이며, 그것을 감당하기 어려울 것이다.

당연하다.

그동안 회피하느라 충분한 경험이 즉, 데이터가 쌓이지 못했다.

귀여운 눈보라 정도가 옷깃에 닿는 정도가 될 수도 있었지만, 걷잡을 수 없이 불어난 아파트만 한 눈덩이를 맞아야 한다.

회피하는 동안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는 눈덩이들이 착실히 쌓여 온 것이다. 인지하지 못했을 뿐.

충분히 직시하는 생각과 걱정에서 옳은 판단을 내릴 수 있고, 좋은 결과를 맞이할 수 있다.

준비했기 때문이다.

단, 지나친 걱정과 생각들은 판단을 흐리게 하고, 길을 이탈시킬 수 있다.

자칫 걱정이 걱정을 부르고 생각이 생각을 키우는 다람쥐 쳇바퀴를 경계하라. (다람쥐 쳇바퀴가 나쁜 것이라는 말이 아니다. 의미가 없는, 무의미한 걱정과 생각을 경계하라는 말이다)

효율적으로 정신을 운용하고 다스려라.

걱정과 생각을 절제하거나 억제하는 것은 마법이 아니다.

그것은 편법조차도 되지 않는다.

다스려라.

걱정은 멈춘다고 멈추어지는 것이 아니다.

걱정은 다스리는 것이다.

삶을 다스리는 것처럼 말이다.

삶을 살면서 함께하는 것이 걱정이고 생각이다.

우리의 삶이 계속되는 동안, 걱정도 계속 따를 것이다.

삶이 멈추지 않는 한, 걱정도 멈추지 않을 것이다.

건강하고 의미 있는 걱정을 하라.

이상 ‘과도하고 과도하면서 지나친’ 걱정을 멈추는 방법이었다.

한 마디 더 남기겠다.

“어떠한 구절이나 유명 인사의 말을 거리낌 없이 따르는 것은 위험하다. 취할 것은 취하고 비판해 볼 것은 비판하라.

스스로 생각하라.”

-jj

글을 마치며. +jj의 생각

글을 쓰다 보니 ‘걱정을 멈추는 방법’과 ‘과도한 걱정을 멈추는 방법’의 차이에 대해서 중요성을 많이 둔 것 같다. 그 차이가 너무도 크기 때문이었다.

‘걱정을 멈추는 방법’과 ‘과도한 걱정을 멈추는 방법’의 차이가 극과 극에 달할 만큼 크기에, 앞으로 ‘걱정을 멈추는 방법’ 앞에는 ‘과도한’을 꼭!! 붙여서 ‘과도한 걱정을 멈추는 방법’처럼 바꾸어 생각해 보길 바란다.

그리고 걱정을 단순히 부정적으로 말하는 것을 발견한다면, 즉시 눈 앞에서 치워버리고 귀를 닫아버리기를 바란다. 쓸데없는 것이다. 그것이 정작 부정적이고 나쁜 것이다.

“상황이 좋으면 누가 걱정을 하겠어?”, “상황이 좋아지면 당연히 걱정 따위는 들지 않지 않겠어?”

언제나 좋은 상황을 만들 수 있는가? 언제나 모든 것을 좋은 상황으로 만드는 능력이 있는가? 좋은 상황을 만들기 전에는 걱정(생각)을 하지 않는가?

그것은 그저 단편적인 예일 뿐이다.

우리는 사람이다.

시리즈 : 데일 카네기
error: Content is protected !!